동물병원용 EMR을 개발하는 벳칭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2023년 3월에 처음 합류하게 되었고 1년 동안 정말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요. 이 글에선 제가 벳칭에 합류한 후 첫 프로젝트였던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리브랜딩을 진행한 이유
처음 벳칭에 합류해서 벳칭의 로고나 프로덕트 디자인을 봤을 때 사실 개인적으론 크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잘 쓰지 않는 컬러 조합이었는데요. 신선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가지 큰 문제점이 보였습니다.
첫 번째는 브랜드의 컬러 시스템이 온통 파스텔톤의 컬러로 이루어져 있어 콘텐츠와 인터페이스에 적용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실제로 이전에 만들어진 프로덕트를 봤을때 인터페이스의 정보 구성에 위계가 없는게 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기존 브랜딩에 근거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내부 구성원들에게 물어봤을 때 지금의 디자인은 회사나 팀원들의 목표와 비전과 연결되지 않은 채 그냥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벳칭의 프로덕트를 고도화 하기 이전에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행히 대표님과 구성원들도 큰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합류했을 때 본 벳칭의 로고와 프로덕트 디자인
브랜딩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싸움과 전쟁에 명분이 필요하듯 디자인에도 근거(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유 없이 만들어진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역량에 따라서 예쁠 순 있지만, 앞으로 브랜드가 성장하면서 만들어질 다른 여러 디자인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스타일 가이드 이상의 디자인 기준점이 되긴 어렵습니다.
저는 브랜드 디자인은 크게 두가지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브랜드의 목표가 명확해야 하고 그걸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만들고자 하는 브랜드의 시각적인 특성이 기존의 플레이어들과는 다른 차별점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우리 브랜드의 목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내부 구성원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설문의 질문은 주로 우리가 어떤 목표로 해야할 지 그리고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기본 질문
1. 동물의료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우리 브랜드의 목표가 있다면 뭘까요?
2. 우리가 동물의료 프로그램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미션이 있을까요?
3. 우리 서비스는 수의사, 병원, 환자 등 우리의 고객들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까요?
4. 우리가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고객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보여야 할까요?
*이런 내부 설문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얻을 수 있는 점에서도 좋지만 내부 구성원들이 우리의 목표나 미션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할 수 있는 계기도 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구글폼으로 받은 설문 결과입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블러처리
여러가지 좋은 답변을 많이 받았는데요. 대부분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방향은 비슷했습니다. 바로 전문적이고 명확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브랜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내렸습니다.
Brand Identity System(Lean ver)BRAND ESSENCE
우리 브랜드의 핵심 정신이나 본질 | 반려동물 의료 혁신의 선두주자
동물병원의 EMR과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 혁신을 주도하며, 기존 시스템의 불편함을 개선하여 의료 서비스의 질과 효율을 극대화합니다. |
CORE VALUES
고객이 우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핵심 가치 | 사용의 용이성
벳칭의 EMR은 기존 프로그램보다 훨씬 사용하기 쉽고 편리합니다. 이를 통해 수의사는 더욱 빠르고 정확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의료 서비스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진료 프로세스 혁신
벳칭은 수의사의 진료 프로세스를 개선하여 실질적인 고객의 진료 시간을 단축시킵니다. 이는 병원의 운영 효율성을 높이고, 고객 만족도를 증진시킵니다. 결국 이러한 효과는 병원의 매출 증대로 직결됩니다.
모바일과 다양한 기기에서의 접근성
벳칭의 프로덕트는 병원 내의 고정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모바일 및 태블릿 등 다양한 기기를 통해 어디에서나 접근할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합니다. 이는 수의사가 보다 유동적이고 효율적으로 진료할 수 있도록 해, 전통적인 진료 방식의 제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
PERSONALITY
브랜드에서 풍기는 고유한 개성 또는 분위기 | 전문적인, 안정된, 명확한, 문제를 해결하는 |
일반적인 브랜딩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요소들을 담아내는데요. 저는 린브랜딩의 MVB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브랜드 에센스, 코어밸류, 퍼스널리티만 심플하게 설정해보았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스타트업이기에 지키지도 못할 요소들을 여러가지로 설정하는 것 보다는 핵심이 되는 요소만 확실하게 설정해서 그때그때 유연하게 대응하는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별성 있는 키컬러 정하기
브랜드의 컬러를 정할때 저는 세 가지를 고려합니다.
1. 시장에서 독특한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는가? (시장의 기존 브랜드와 겹치지 않아야 함)
2. 브랜드 에센스를 표현할 수 있는 컬러인가? (브랜드 에센스와 동떨어지지 않아야 함)
3. 콘텐츠와 인터페이스에 활용하기 좋은 컬러인가? (채도는 높게, 가능하다면 빨간색은 피해서)
[전문적인, 안정된, 명확한, 문제를 해결하는]을 표현하는 컬러라고 했을 때 흔히 블루 컬러를 떠올립니다. 실제로 블루는 금융과 의료 등 전문성을 상징하는 컬러로 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브랜드의 에센스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터페이스에서 활용하기 좋다는 점도 딱 좋았기에, 기존 시장에 겹치는 플레이어만 없다면 그대로 블루로 확정지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실제로 시장 조사를 진행한 결과 기존 출시된 동물병원 EMR 중에서는 블루 컬러를 메인으로 사용하는 경쟁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2024년 현재는 유사한 컬러를 사용하는 새로운 경쟁사가 등장했습니다.)
블루컬러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너무 차갑게 보일 수도 있기에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데요. 인터페이스에서 포인트로 사용할 수 있도록 높은 채도를 유지하면서도 너무 차갑지 않은 적정한 컬러를 찾다가 Azure Blue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브랜드 컬러 관련 내부 교육 자료 중 일부
Azure blue는 밝고 생기 있는 청색 계열의 색상으로, 하늘의 맑은 색을 연상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색상은 주로 평온함, 신뢰성, 안정감을 전달하는 데 사용되며, 광고, 디자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활용됩니다. *GPT선생의 설명
이 과정 이후엔 결정된 키 컬러를 기반으로 무드 보드를 제작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질 듯 하여 이 부분은 생략합니다
통일성 있는 로고 만들기
벳칭에서 개발 중인 프로덕트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고, 앞으로의 브랜드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로고 제작 가이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전통적인 가이드보다는 제작 과정의 기록에 더 가깝습니다. 로고의 구체적인 디자인 요소들—예를 들어, 심볼의 크기, 각도, 라운드 값, 두께, 그리고 로고타입을 위한 폰트 설정을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만들어갈 프로덕트 디자인를 위해 일관된 기준을 만들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 가이드는 이미 약 5개의 하위 프로덕트 로고 제작에 활용되었으며, 일관된 스타일의 로고를 만들어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로고의 일관성에 집중하는 이유는 병원용 소프트웨어의 특성 때문입니다. 병원용 하위 프로덕트들은 차트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사용자가 우리의 프로그램을 빠르게 식별할 수 있도록 아이콘 스타일을 통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벳칭, 플러스벳 로고 제작 가이드
플러스큐 로고 제작 가이드
로고를 만든 이후엔 그래픽 모티브를 제작했습니다. 로고의 형태 일부를 차용하고 우리가 보여주려는 Personality 중 일부를 도형으로 형상화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모티브는 실제로 사용된 예시가 거의 없어 그냥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랜드 일관성을 위한 내부 공유
*사내 컬러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발표자료, 공개해도 괜찮을 듯 하여 그냥 올려버렸습니다.
열심히 만든 브랜드 디자인을 디자이너만 사용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고객과 마주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일관된 색깔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브랜딩이고, 이를 위해선 내부 공유는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을 하거나 브랜드 가이드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 저 이외엔 대부분 개발 직군이었고 브랜드 가이드가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대신, 새롭게 만들어진 브랜드 컬러를 중심으로 내부 교육 자료를 제작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컬러의 의미, 사용 방법, 그리고 그것이 브랜드에 가져다주는 효과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로 했습니다. 개발 직군의 구성원들이 단순히 디자인을 구현하는 것을 넘어, 디자인이 변경된 이유와 앞으로 우리 디자인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기를 바랐습니다.
브랜딩 적용하기
이렇게 만들어진 브랜드 디자인은 일년 동안 많은 디자인에 적용되었습니다. 인쇄물을 만들고 웰컴 키트를 만들고 사원증을 만들고 회사에서 개발하는 여러 프로덕트에 사용될 디자인 시스템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아직까진 적당히 기능하고 있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습니다.
사실 린브랜딩은 최소기능브랜드(MVB)를 만들어내고 이후에 시장 반응과 고객 피드백을 통해 지속적인 개선을 진행해야 하는 브랜딩 방법론이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올해는 이 부분에 대해 고객 피드백을 통해 브랜딩을 개선하고 그래픽모티브를 제작하는 등 브랜딩 부채(Debt)를 청산해야 합니다.
다음엔 브랜딩 프로젝트 이후 진행된, 디자인 시스템 제작 및 구현 과정을 공유드리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