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키치 감성을 담은 서브타이틀 폰트, 양진체 이야기

양진체는 제가 제작하여 2019년에 공개한 폰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운로드 페이지 외에는 양진체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양진체의 탄생 배경과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양진체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Q. 양진체는 왜 미완성 상태로 계속 유지 중인가요?

A. 양진체는 원래 특정 기업의 전용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도중에 드랍되면서, 버리기엔 아까워 미완성 상태로 공개된 것이 지금의 양진체 0.9 버전입니다.
사실 완성도를 높여 정식 1.0 버전과 패밀리 폰트까지 제작할 계획이 있었어요. 하지만 퇴사와 함께 제가 사용하던 폰트 제작 소프트웨어의 라이센스 접근권이 사라졌고, 이후에는 다른 일로 바빠 미루다 보니 어느새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소프트웨어를 다시 구매해 작업을 이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벅차서요.)
이 프로젝트는 별도의 팀이 아니라 저 혼자 담당하며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처럼 진행됐습니다. 회사에서 사용되는 인쇄물과 마케팅 이미지에 활용하고, 동시에 기업 폰트를 무료로 배포하여 웹사이트 방문자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1안은 레트로 컨셉의 폰트 2안은 캐릭터 일러스트에 어울리는 폰트로 제안했습니다.
초기에는 레트로 무드와 캐릭터 상품에 맞춘 두 가지 컨셉을 제시했으나, 논의 끝에 캐릭터에 어울리는 폰트로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이후 반년 넘게 작업을 진행하며, 중간중간 내부 공유와 SNS·마케팅 이미지 활용을 통해 폰트를 다듬어 갔습니다. 그러나 최종 피드백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기획 초기부터 수차례 공유했음에도 디자인 부서에서는 기획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피드백은 대부분 학부에서 배운 이론을 기준으로 했으며, 이 시점에서는 이미 방향을 바꾸거나 수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반년 넘게 공들인 프로젝트는 그대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기획 단계부터 꾸준히 공유했음에도 최종 단계에서 엉뚱한 피드백이 나왔고,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프로젝트가 무산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특정 구성원의 잘못이라기보다 기업의 업무 프로세스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깊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다행히 폰트의 개인 소유권을 인정받아 0.9 베타 버전으로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완성 상태라 일부 글자의 형태가 어색하거나 커닝(글자 간격)이 완벽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길에서 양진체를 마주칠 때면 “조금 더 다듬고 공개할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정식 1.0 버전을 내놓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UI/UX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어, 폰트를 다시 수정할 여유가 없어 양진체는 여전히 베타 버전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Q. 양진체는 어떤 컨셉의 폰트인가요?

양진체를 만든 세 가지 목적
A. 양진체를 컨셉으로 설명하자면 ‘레트로 키치 서브타이틀 폰트’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스타일’을 말하는게 아니라 특정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를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이런 컨셉의 폰트가 만들어졌습니다. 특정 목적은 위에 표시된 세 가지로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이어서 진행하겠습니다.

 컨셉의 배경과 목적

첫 번째 목적은 회사의 주력 아이템이 캐릭터 일러스트 상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사 디자인팀은 다양한 무료 폰트를 활용해 캐릭터와 함께 그래픽 작업을 했지만, 타 기업의 폰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만의 기업 폰트를 제작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회사가 주로 제작하고 판매하던 레트로 키치 스타일의 상품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상품 뿐 아니라 매장 디스플레이, 웹사이트, SNS 이미지 등에서도 이러한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양진체는 이러한 비주얼 요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세 번째 목적은 폰트의 용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목용 폰트처럼 강렬하지도, 본문용 폰트처럼 무난하지도 않은, 중간 지점에 위치한 폰트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서브타이틀용 폰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양진체는 캐릭터 일러스트의 존재감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래픽 이미지나 자막 등에서 적절한 무게감과 독창성을 발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실제로 출시 이후 양진체는 자막, SNS 이미지, 간판 등에서 활용되며 의도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양진체들

 획의 형태

양진체는 기본적인 획의 형태에 레트로 무드를 담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컴퓨터로 서체를 제작하기 이전 시대(90년대 이전)의 레터링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대표적인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시옷(ㅅ)의 오른쪽 줄기가 일반적인 한글 서체처럼 사선으로 내려가지 않고, 위로 살짝 솟았다가 내려오는 곡선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양진체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요소입니다.
둘째, 밑 가로선(니은, 디귿, 리을, 티읕 등)이 오른쪽 위로 살짝 기울어 올라가며, 세로줄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최근의 폰트는 보통 이 획을 따로 분리하는데, 양진체는 이를 연결하여 레트로 감성을 강조했습니다.
(상)양진체 ㅅ 형태에 영향을 준 레트로 레터링들 *출처 : 레터링1, 도서출판 우람 / (하)양진체 형태 예시
(상)양진체 밑 가로선 형태에 영향을 준 레트로 레터링들 *출처 : 레터링1, 도서출판 우람 / (하)양진체 형태 예시

 글자틀 내에서의 글자 배치

한글 서체는 자모 조합(받침 유무, 복모음 등)에 따라 글자 높이가 달라지며, 이로 인해 문장 전체에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양진체는 이런 시각적 균형을 일부 포기하는 대신, 모든 글자를 글자틀 내부에 꽉 차게 배치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자모 조합과 상관없이 상단과 하단을 일정하게 맞추어 글자 간격이 균일하게 보이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배치는 투박하면서도 독특한 균형감을 주며, 특히 옛날 포스터나 간판에서 볼 수 있는 레터링 스타일을 연상시킵니다. 또한 본문용 폰트와 함께 사용될 때, 서브타이틀로서 적절한 무게감과 존재감을 갖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글자폭의 변주

양진체의 가장 독특한 점은 글자마다 폭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한글 폰트도 자모 조합에 따라 글자폭이 달라질 수 있지만, 양진체는 규칙적인 패턴 없이 일부 글자의 폭을 미묘하게 조정했습니다.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요? 의도적으로 규칙을 깨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기계처럼 정교한 형태보다 수타면처럼 미세한 차이가 있는 디자인을 선호합니다. 리소그라피나 실크스크린 인쇄처럼, 사람이 손으로 만든 듯한 미묘한 어긋남이 주는 매력을 폰트에도 반영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일러스트와 함께 사용할 때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대칭적이고 정형화된 폰트는 자유로운 그림과 조합될 때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미세한 변화를 준 양진체는 보다 유기적인 조화를 이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첫째, 글자폭이 일정하지 않아 세로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
둘째, 윗선과 아랫선을 맞춘 구조 때문에, 변화를 주었음에도 시각적으로 딱딱한 느낌이 남는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특정 스타일의 디자인에는 잘 어울리지만, 범용성은 다소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Q. 폰트에 대한 본인만의 관점이나 생각이 있다면?

A. 조금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저는 폰트를 요리의 재료라고 봅니다. 어떤 재료는 그 자체로 훌륭하지만, 어떤 재료는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다듬어,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저는 이것이 디자이너의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디자이너가 되려면 다양한 재료를 경험해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양진체 역시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사실 전통적인 폰트 디자이너라면 결코 만들지 않을 형태의 서체입니다. 일반적으로 폰트를 최종 결과물로 완성하는 것이 목표라면, 양진체 같은 폰트는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짜 폰트 디자이너입니다. 저는 폰트를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디자인 과정에서 활용하는 하나의 ‘재료’로 본다는 점에서 접근 방식이 달랐습니다.
양진체는 그 자체로는 투박한 재료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다듬고 조리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적절한 효과를 더하면 메인 요리(그래픽이나 일러스트)를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굽거나 튀기듯 효과를 넣어 사용하거나, 접시에 담듯 그래픽 안에서 적절히 배치하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옵니다. 때로는 살짝 가미하는 것만으로도 특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재료이기도 합니다.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다음 질문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Q. 양진체는 어떻게 써야 예쁘게 쓸 수 있나요?

A. 2021년 2월, 월간 디자인에서 ‘디자이너를 위한 서체 견본집’이라는 주제로 독립 디자이너들의 서체가 소개되었으며, 그중 하나로 양진체도 포함되었습니다.
폰트 소개를 위한 이미지를 요청받았을 때,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결국, 양진체의 활용법을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레시피 이미지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양진체를 사랑해 주셨지만, 실제 사용된 모습을 보며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2021년 2월 월간디자인에 수록된 ‘양진체 레시피’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폰트를 하나의 재료로 봅니다. 양진체 역시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그 자체로는 심심할 수 있지만, 적절한 효과를 더하면 보다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습니다.
양진체는 뾰족한 각이 없는 폰트입니다. 모든 획에 미묘한 라운드 처리가 되어 있으며, 완전한 곡선이 아닌 굴림과 고딕의 중간 정도의 형태를 가집니다. 이는 글자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면서도, 별다른 조정 없이도 그래픽 효과가 자연스럽게 적용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겹침 효과를 사용했을 때 양진체와 일반 고딕체의 차이점, 양진체는 그냥 겹치기만 해도 효과가 자연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예를 들어, 아웃라인 효과나 겹침 효과를 적용하면 일반적인 고딕체는 뾰족한 모서리가 강조되면서 외곽선이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반면, 양진체는 기본적인 라운드 처리 덕분에 별도의 수정 없이도 깔끔한 형태를 유지합니다. 또한, 입체 효과나 겹침 효과를 사용할 때도 글자 외곽선이 부드럽게 연결되며,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진체는 다양한 그래픽 효과와 조합하기 쉬운 서체입니다. 기본 형태가 단순하여 활용 방식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으며, 별도의 보정 없이도 자연스럽고 균형 잡힌 결과물을 제공합니다.

️ 마무리하며

양진체는 특정 기업의 전용 서체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유롭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더 많은 곳에서 발견될 때마다,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된 모습을 볼 때마다 폰트 제작자로서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비록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이후 언젠가 새롭고 발전된 형태로 다듬어질 기회가 오길 기대해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